이번 프로젝트의 규모는 LH에서 발주한 1000세대가 훌쩍 넘는 대규모 공동주택 단지이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설계비만 몇 십억이 넘었기에 되짚어보면서 전체적인 프로젝트를 살펴보고자 한다.

현상프로젝트를 참여한 지 만 9개월이 지나고 있는 현재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PM과 헤더의 중요성, 대략적인 현상프로젝트의 프로세스, 설계도집에 필요한 협력업체의 발주, 팀원과의 협업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원하는 지.

전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모든 결정을 하는 헤더가 큰 틀을 잡아 모든 프로젝트 참여인원에게 큰 방향을 같이 나아가자고 외쳤을 때의 프로젝트 완성도는 상당히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외침은 전체 팀이 한방향으로 가게끔하는 원동력이었고 팀원들 마음 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헤더가 명확하고 확고한 큰 방향을 제시했기에 큰 틀에 대한 제안보다는 큰 틀을 지지하는 작은 틀을 만드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고 사소한 결정은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더의 명확하고 확고한 방향성 설정이다. 모든 사람은 아닐지언정 전반적으로 납득이 가는 방향은 충분히 프로젝트를 이끌어갈 힘이 있었다. 여기서 그 어휘와 언어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않는 것은 나또한 프로젝트의 큰 틀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모든 정보를 취합하는 헤더나 PM가 다르게 얻는 정보가 적어 프로젝트 중간의 어떤 사항에서 결정이 난지는 알 수 없지만 프로젝트가 끝났고 전반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설계도집을 맡았기에 큰 결정이 무엇인지 어떻게 흘러왔는지는 파악이 가능했다. 

현상프로젝트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것이 해결되었을 때부터는 속도가 붙기 마련이다. 이번 프로젝트도 마찬가지, 공동주택에서 가장 중요한 배치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고 괜찮은 배치가 나온 뒤로는 프로젝트가 원만히 진행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서 다음은 주민공동시설과 상가시설의 위치와 규모를 풀어나가는 논리였다. 단지 주변의 주요한 노드점과 단지 내부를 관통하는 주생활가로에 면하게 위치한 부대시설은 계획의 완성도를 높여갔다. 그리고 설계도집의 '꽃', CG발주가 시작된다. 설계보고서, 설계도집, PT, 홍보물의 가장 첫번째 면을 장식하며 전체적인 프로젝트의 이미지를 상상하게 그려주는 조감도의 범위, 각도, 높이를 가장 이쁘고 명확하게 프로젝트를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선정해 CG업체에 모델링을 요청한다. 방향성이 또한 요구되는 곳은 당연히 설계도집이다. 결국, 현상설계에서 심사위원들이 마주하는 것은 설계도집과 PT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프로젝트의 흐름을 풀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설계도집이다. LH현상설계는 순서와 어느정도의 페이지가 정해져있다. 첫번째 장은 조감도이고 마지막장은 예정공정표로 20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예전 기술공모때는 50페이지가 넘는 어마무시한 량은 자랑했지만, 박근혜 정부의 뉴스테이를 지나 문재인 정부의 청년주택으로 넘어오면서 기술공모와 뉴스테이가 결합한 형태의 설계도집을 요구하고 있다. 설계도집의 목업을 잡아 PM과 이야기하여 전체적인 도집의 틀을 구성한다. 그다음은 배치, 단위, 부대시설, 주차장, 특화 등 각 개인이 계획하는 있는 분야로 장떼기로 나눠주거나 설계도집인원이 능력이 있고 충분하다면 관련 장의 삽도를 도집팀이 작성하기도 한다.  전체적인 도집의 통일성을 위해서는 도집팀이 삽도를 그리는 게 좋지만 아무래도 계획한 사람이 그 분야를 제일 잘 알기때문에 장떼기가 내용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설계도집과 함께 가져가야 할 것은 설계보고서와 PT이다. 설계보고서에 들어간 내용만 PT에 들어갈 수 있기에 PT 목업과 설계도집은 같이 가면서 설계보고서에 들어갈 내용을 정리해야한다. 설계보고서는 80%이상이 설계도집에 들어가는 내용을 짜집기해서 들어가고 PT는 전체적인 방향을 가장 간단하게 보여주기에 동시에 진행하면서 설계보고서의 방향을 정하는 게 가장 효율이 좋았다. 설계보고서와 PT에는 재무, 임대, 계발 3가지 요소가 페이지를 나누어서 들어가게 된다. 보통, 이전 사례를 토대로 크게 페이지를 할당하고 전체적인 헤더의 방향에 따라 한두장씩 가감하여 내용을 채우게 된다. 아무래도 모든 프로젝트는 사업성이 중요하므로 재무 쪽의 점수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한다. 건축은 어느정도 성능만 나오면 큰 점수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프로젝트가 90%이상 진행되면 편집팀으로 자료가 많이 넘어가 표현과 수정을 하는 단계이다. 한번 편집팀에서 손을 타서 넘어온 장은 수정과 보완으로 완성도를 서서히 높인다. 기본적인 내용, 글자 크기, 선 위계, 표현방법 등 손댈 것 투성이다. 이쯤되면, 설계도집팀은 굉장히 바쁘고 계획팀은 손이 많이 준다. 이제부터는 큰 틀이 바뀌지 않는 이상 완성도를 올리는 작업이 주업무가 되는 것이 맞다. 여기서, 감당 못할 정도로 방향을 바꾸게 되면 마감 직전까지 손을 대야한다. 이곳도 PM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기존 방향에서 표현이나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PM과 마감효과를 이용해서 계획과 방향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것만 넣기위해 방향을 바꾸는 PM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가 훨씬 낫다. 왜냐면, 결국 완성도는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표현의 완성도가 도집이나 패널의 완성도를 높이는 효과를 부르기 때문이고 수정을 하게 되면 사람인지라 반드시 실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작게는 오타부터 크게는 내용의 탈락이다.

이번에도 몇번의 고비가 있었으나 잘넘기고 당선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쉼없는 긴장과 작업의 연속은 사람을 끝없이 지치게 하지만 마감 후 그러한 긴장과 야근, 철야에서 벗어났을 때의 해방감은 미세먼지가 심해 앞이 보이지 않는 날, 순풍이 불어 푸른 하늘과 멋진 구름이 드러난 아름다운 세상과 같다. 다만, 이러한 해방감이 마냥 기쁘지많은 않다. 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가장 크고, 지겹도록 반복될 것이라는 상상은 마치 닥터스트레인지에 의해 무한의 시간 속에 빠진 도르마무의 기분을 알 수 있게 한다. 게다가 그러한 야근과 철야 속에서 나의 몸이 망가지고 그러한 생각을 했을 때의 절망감은 나를 현상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본능처럼 느껴진다.

현상을 하다보면 세상에 지어진 건물들을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먹고 엄청난 노력에 의해 탄생한 결과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간을 먹는 건물과 도시는 쉽게 붕괴되지도 않고 쉽게 바뀌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건축과 도시가 힘없이 파괴된다면 허탈한 감정이 세상을 감싸지 않을까 하는 상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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